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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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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흥륜사 댓글 0건 조회 595회 작성일 16-04-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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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공화국
요약 유럽 중부 발트해에 면해 있는 공화국. 
정식 명칭은 폴란드공화국(Republic of Poland)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491㎞이다. 면적은 31만 2, 685㎢, 인구는 3, 850만 696명(2008년 현재), 수도는 바르샤바(Warsaw)이다. 행정구역은 16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의 대부분은 서슬라브인종에 속하는 폴란드인이 96.7%이며, 그 밖에 독일인이 0.4%이다. 언어는 폴란드어가 통용되고, 종교는 가톨릭교가 95%이며, 그 밖에 그리스정교·유태교·개신교가 있다.
기후 상 서유럽의 습도 높은 해양성 기후로부터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로 옮아가는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위치하고 있다. 
2008년 국민총생산은 6, 845억 달러, 현재 1인당 국민소득 1만 7, 80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4년의 상원(100석)과 하원(46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주요 정당으로는 국민당, 민주좌파연합, 사민당, 노동자연합 등이 있다. 

[약사]
슬라브인들이 9세기 초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18세기에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3국에 의하여 분할되었으나 제1차세계대전 후 1918년 11월 11일 독립하였다. 1939년 9월 소련과 독일에게 침략당하였으며, 1947년 1월 공산당정부가 수립되었다.
1956년 6월 포즈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식량폭동을 계기로 반소 자유화운동이 폭발, 그 해 10월혁명으로 민족주의자인 고물카(Gomulka, V.)가 통일노동당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 뒤 1970년 12월 경제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식량폭동이 발생하여 기에르크(Gierk, E.)가 당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81년 10월 야루젤스키(Jaruzelski, W.) 참모총장이 당 제1서기에 취임하여 수상·국방상직을 겸임하였다가 1985년 11월 수상직을 사임하고 1989년 7월 신설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 동안 폴란드는 1988년 5월과 8월에 자유노조(솔리다르노스치)가 주도하는 1981년 이후의 최대의 파업으로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이 마비되는 등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위험에 직면한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1988년 8월 26일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에게 자유노조의 합법화를 토의하기 위한 원탁회의를 제의하였고, 이에 따라 바웬사의 설득으로 파업이 종결되었다. 1989년 4월 새 헌법에 따라 1989년 6월 총선거 후 자유노조가 주축이 되어 비공산당연립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1991년에는 노동자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바웬사(Wałęsa, L.)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2005년 12월 취임한 레흐 카친스키(Lech Kaczynski) 대통령이 정부를 이끌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가 공산국가였던 폴란드에 공식적으로 입국한 것은 1969년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68차 IOC총회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 3명이 참석한 것이었고, 1975년 서울에서 열린 산업개발기구(UNIDO)의 제2회 국제포장세미나에 산업개발기구산업개발담당관이 폴란드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참가하였다. 

이후 1989년 6월에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으며, 그 해 11월 1일 양국의 공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양국 간에는 1988년 11월 무역사무소개설 협정을 개설한 이래, 1989년 5월 교육교류 협정, 1989년 11월 무역 협정과 투자보장 협정, 1991년 6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1년 10월에 항공 협정, 1993년 6월에 문화 협정과 과학기술협력협정, 1993년 11월에 사증면제 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한 바 있으며, 1994년 12월에는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대 폴란드 수출액은 2005년 현재 26억 1333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강과 유기화학품 등이며, 수입액은 2억 7087만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부품과 일반기계 등이다. 폴란드는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 206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는 인류가 저지른 광기의 역사를 상징한다. 1945년 1월 해방되기까지 400만 명이 이 끔찍한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치 독일 최대의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940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폴란드 의회의 결정에 따라 전쟁 기념비가 된 아우슈비츠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이 되었다.
400만 명의 희생자“나는 연주한다./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연주하고, 구슬프게 노래했다./아아, 나의 민족이여/수백만 유대인이/내 주위에 서서 귀기울렸다./학살당한 수백만 명이 귀기울이고 서 있었다./대성공이다.” 

이디시어 시인 이츠호크 카체넬손은 [몰상당한 유대인의 위대한 노래] 제2절을 이렇게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이것은 독일어이며,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이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카체넬손은 동유럽계 유대인이 사용하는 독일어를 기반으로 한 융합 언어이자 자신의 모국어인 이디시어로 이 시를 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1월의 일이었다. 1년 후, 소비에트군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럽 각지의 약 30개국에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카체넬손과 함께 죽음을 당한 사람은 400만 명이 넘는다. 희생자의 2/3은 유대계였다.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은 아우슈비츠 근처에 있는 병영을 접수했다. 이것이 후에 나치 최대의 강제 수용소로 발전하게 된다. 1940년 여름 이후, 나치 독일은 ‘선의에 따라 유대인을 보호 수용하는 장소’‘행복한 세계’라는 말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외국에 선전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가시 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담과 울타리, 그리고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이 있는 공포스러운 시설이었다. 나치 친위대의 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이 아우슈비츠를 ‘인류 역사가 자랑하는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라고 평했다. 그리고 힘러는 바로 그 역사로 인해 인류에게 중대한 죄를 지은 범죄자로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42년 아우슈비츠 근처에 ‘최동 해결’을 실시하기 위한 절멸 시설로서 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는 ‘브제진카’) 강제 수용소가 완성되었다. 이윽고 인류 역사에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수용소의 문 위에 쇠를 잘라 만든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 이 수용소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표어를 바라보았을까?
기만적인 보호 구치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보호 구치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치 친위대는 가축처럼 화물차에 빽빽이 실린 채 긴 여행을 마친 유대인들을 선별했다. 극도로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그리고 어린이 등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 노동 집단에서 분리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최후의 단계로 보내져 공동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격리 기간이 마련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용된 사람들은 치욕을 당하고, 학대받고 굶주린 채 줄줄이 늘어서서 머리카락이 깎이었다. 그리고 팔에는 등록 번호를 새겨야 했으며, 옷에는 수용소로 보내진 이유를 표시한 삼각형 천조각을 달아야 했다. 격리 기간 중에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후 작업반에 배치되어 대부분은 아우슈비츠에서 꽤 떨어진 모노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IG-파르벤사의 공장이 있던 이 수용소에서 합성 고무 제조에 종사하게 되었다. 

치클론B
수용된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노동 조건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IG-파르벤사와 거기에 소속된 독일 해충 구제 협회는 1941년부터 수용소에서 대량 학살용으로 사용하던 치클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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